지역소멸/문화 정체성의 소멸

뱀골'과 '뒷산'은 없고 '그린빌 1차'만 남았다: 아파트 단지가 지우는 토착 지명

구0305 2025. 8. 11. 07:37
'뱀골'과 '뒷산'은 없고 '그린빌 1차'만 남았다: 아파트 단지가 지우는 토착 지명

'뱀골'과 '뒷산'은 없고 '그린빌 1차'만 남았다: 아파트 단지가 지우는 토착 지명

1. 내비게이션에도 없는 이름, '말죽거리'

오래된 지도와 나침반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에도 본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밤나무가 많던' 율동(栗洞), '긴 개울이 흐르던' 장천(長川)처럼, 그 이름에는 땅의 생김새와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이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수백 년 된 마을의 이름은 '힐스테이트', '더샵퍼스트월드', '센트럴파크' 같은 국적 불명의 이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과거旅人들이 한양으로 향하며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다던 '말죽거리'는 이제 양재역 사거리라는 행정적 명칭으로만 남았고, 아이들은 동네 뒷산에 오르며 '래미안 파크'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땅의 기억을 품고 있던 토착 지명의 소멸은 단순히 옛 이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뿌리내리고 사는지를 알려주는 정체성의 나침반을 잃어버리는 과정입니다.

[시각 자료 1] 지명의 변화: 과거와 현재
과거의 토착 지명현재의 아파트 이름
까치울 (까치가 많던 울타리)○○ 포레스트
다락원 (다락이 있던 역원)△△ 리버파크
무수막 (물이 없는 막다른 골)□□ 더 플래티넘

2. '고급스러움'을 위한 거래: 이름에 담긴 경제 논리

하늘을 향해 솟은 현대적인 아파트 건물들

토착 지명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건설사들의 경제 논리 때문입니다. '구렁이골'이나 '피밭' 같은 토속적인 이름은 낡고 촌스럽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대신 '파크(공원)', '리버(강)', '레이크(호수)' 등 자연을 의미하는 영단어나, '캐슬(성)', '팰리스(궁전)'처럼 고급스러움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조합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부동산 네이밍 전략은 소비자들에게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주거 환경'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분양 성공률을 높이는 데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결국,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은 아파트의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한 마케팅 전략과 맞바꿔지는 셈입니다. 땅의 고유한 이야기는 지워지고, 그 위에는 자본의 논리로 포장된 낯선 이름표가 붙게 되는 것입니다.

[시각 자료 2] 최신 아파트 이름 선호 키워드

40% 자연 (파크, 포레, 리버)

30% 외국어 (센트럴, 퍼스트, 시티)

20% 고급 (캐슬, 팰리스, 더원)

10% 기타 (브랜드명 등)

3. 이름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장소성의 상실

마을의 역사를 상징하는 오래된 고목

지명은 단순한 기호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그 땅의 지리적 정보와 역사,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너더리'(강가의 너른 돌밭), '쇠내'(물에서 쇠가 나던 개울) 같은 이름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생생한 지리 교과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사라지고 전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수자인'이나 '아이파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리는 그 땅과 맺어왔던 유대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장소성의 상실입니다. 땅은 고유한 이야기를 잃고 정체불명의 공간으로 변해버립니다. 내가 사는 곳이 과거 어떤 곳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기억이 단절되면서, 주민들의 애향심과 공동체 의식 역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는 견고하게 서 있지만, 그 땅의 정신은 소리 없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시각 자료 3] 토착 지명에 담긴 정보

예시: 서울 '마포(麻浦)'

조선시대 '삼(麻)'을 재배하고 거래하던 나루(浦)라는 의미. 당시의 주요 산업과 교통의 중심지였음을 이름 하나로 알 수 있음.

예시: 부산 '자갈치'

'자갈이 많은 해안(處)'이라는 의미. 지명의 유래를 통해 과거 해안선의 모습과 지리적 특징을 짐작할 수 있음.

4. '그린빌' 옆 '포레스트빌': 길 잃은 사람들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 건물들이 늘어선 모습

비슷비슷한 아파트 이름의 범람은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혼란과 인지적 부담을 안겨줍니다. 과거에는 '느티나무 있는 쪽으로 가다가 약수터에서 오른쪽'처럼 자연 지물을 기준으로 길을 찾고 소통했습니다. 이는 우리 뇌가 공간을 인식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힐스테이트 3단지'를 찾아가기 위해 '자이 2단지'를 지나야 하는, 인공적인 기호의 숲속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파크'와 '포레', '리버'와 '레이크'가 뒤섞인 신도시에서는 이름만으로는 위치를 전혀 유추할 수 없어, 외부인은 물론 주민들조차 헷갈리기 일쑤입니다. 이는 땅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시켜 발생하는 일종의 인지 부조화입니다. 땅의 본래 맥락을 무시한 이름 체계는 우리의 공간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고, 내가 사는 동네를 더욱 낯설고 비인간적인 공간으로 느끼게 만듭니다.

[시각 자료 4] 공간 인지 방식의 변화

과거 (자연 중심)

"저기 저 고개를 넘어 개울을 건너면 돼."
(직관적, 경험 기반)

현재 (기호 중심)

"센트럴파크 101동을 찾아 3번 게이트로 가세요."
(추상적, 암기 기반)

5. "우리 동네 이름, 되찾아 드립니다": 지키려는 노력들

지역 주민들이 모여 회의하는 모습

다행히도, 무분별한 지명 파괴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습니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개발 사업 인허가 시, 아파트 이름에 지역의 고유 지명을 포함하도록 권고하거나 의무화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주민들 스스로가 나서서 아파트 이름을 변경하는 사례도 늘고 있습니다. 낯선 외국어 이름 대신, 주민 투표를 통해 친숙하고 의미 있는 옛 동네 이름을 아파트에 붙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명 보존 운동은 단순히 옛것을 고집하는 복고풍 취미가 아닙니다. 이는 자본의 논리에 맞서 우리 동네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지키려는 능동적인 저항이자, 다음 세대에게 땅의 기억을 물려주기 위한 책임감 있는 행동입니다. 소리 없이 사라질 뻔했던 우리 동네의 이름들이 시민들의 노력으로 하나둘씩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시각 자료 5] 지명 보존 운동 사례

사례: 세종시

모든 법정동과 행정동의 명칭을 '한솔동', '나성동' 등 순우리말로 제정하여 도시 전체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아파트 이름에도 이를 반영하도록 유도.

사례: 주민 주도 개명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입주민들이 투표를 통해 '○○캐슬'이라는 이름을 인근 산의 이름인 '△△산'을 딴 '△△산 현대홈타운'으로 변경.

6. '솔밭공원 힐스테이트'처럼: 공존의 지혜를 찾아서

현대적인 건물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

개발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며, 아파트 브랜드가 가진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입니다. 해결책은 옛 지명과 아파트 브랜드를 결합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솔밭공원'이라는 아름다운 옛 이름과 '힐스테이트'라는 브랜드 가치를 결합한 '솔밭공원 힐스테이트'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역의 역사성을 존중하면서도 아파트의 현대적인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상생의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건설사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지자체의 적극적인 '지명 가이드라인' 제시가 필요합니다. 성공적인 로컬 브랜딩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만이 가진 고유한 유산을 발견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땅의 역사를 품은 이름이야말로 그 어떤 외국어 이름보다 더 깊고 고급스러운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시각 자료 6] 바람직한 아파트 네이밍 제안

Bad 👎

더샵 센트럴파크
(의미 없는 외국어 조합, 지역성 완전 배제)

Good 👍

반포 리체
('서리풀'이 흐르던 '반포' + 브랜드명 '리체'. 지역성과 브랜드 가치 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