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구역 통합'은 과연 만능열쇠일까?
옥천-보은 통합 무산 사례로 본 주민 갈등과 실효성 문제
1. '규모의 경제'라는 달콤한 약속, 행정구역 통합론의 등장

인구는 줄고, 재정은 악화되며, 행정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는 악순환. 지방소멸 대응의 시급함 속에서 '행정구역 통합'은 매우 논리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처럼 제시됩니다. 인접한 시·군을 하나로 묶어 중복되는 행정 비용을 줄이고, 공무원 조직을 슬림화하여 행정 효율화를 꾀하자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구와 면적을 키워 보다 강력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국책 사업 유치나 광역 교통망 확충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습니다. 이론적으로 행정구역 통합은 흩어져 약해지는 대신, 힘을 합쳐 더 큰 파이를 만드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책상 위에서 그려진 완벽한 청사진은 왜 현실의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충북 남부 3군(옥천, 보은, 영동)의 통합 논의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이름과 실리 사이: 옥천-보은 통합이 남긴 극심한 주민 갈등

2011년경 본격적으로 불거졌던 옥천-보은 통합 논의(영동 포함)는 행정 논리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고유한 지역 정체성과 자존심을 간과했다는 점입니다. 주민들에게 '옥천'이나 '보은'은 단순한 행정구역 명칭이 아닌, 삶의 터전이자 역사와 문화가 깃든 '고향' 그 자체였습니다. 통합 논의가 시작되자 "왜 우리가 수백 년 된 이름을 버려야 하느냐"는 감정적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여기에 '이름'의 문제를 넘어 '실리'의 문제가 더해지며 갈등은 극에 달했습니다. 바로 통합 군청 소재지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군청 소재지는 지역 경제의 중심이자 상징입니다. 서로 자신의 지역에 군청을 유치하기 위해 사활을 걸었고, 상대 지역으로 넘어갈 경우 우리 지역은 변방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했습니다. 결국 효율성이라는 명분은 지역 이기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혔고, 극심한 주민 갈등만을 남긴 채 통합 논의는 백지화되었습니다.
3. 합친다고 강해질까? 통합의 실효성에 대한 근본적 물음

주민 갈등을 넘어, 통합의 실효성 논란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도 제기됩니다. 과연 인구가 줄어드는 두 지역을 합친다고 해서 '1+1=2' 이상의 시너지가 날 수 있을까요? 오히려 '0.5+0.5=1'이 되어 더 큰 소멸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첫째, 통합 군청이 한 곳에 들어서면 다른 지역 주민들은 행정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한 물리적 거리가 훨씬 멀어집니다. 고령 인구가 많은 농촌 현실에서 이는 행정 서비스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통합이 곧바로 지역의 매력도를 높여 인구 유입 효과를 가져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일자리, 교육, 문화 등 핵심적인 정주 여건 개선 없이 서류상의 통합만으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셋째, 청사 신축, 전산 시스템 통합, 각종 표지판 교체 등 막대한 초기 통합 비용을 고려하면, 단기적인 행정 비용 절감 효과는 미미하거나 오히려 마이너스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결국 통합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더 크고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4. 통합보다 '연합'으로: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해법을 찾아서

옥천-보은 사례는 하향식 행정구역 통합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바로 '통합(Integration)'이 아닌 '연합(Alliance)'입니다. 각자의 정체성과 행정구역은 유지하되, 필요한 부분만 힘을 합치는 기능적 통합이 훨씬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옥천, 보은, 영동 3개 군이 공동으로 '대청호 관광공사'를 설립하여 관광 자원을 함께 개발하고 홍보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접 지역을 묶어 하나의 생활권으로 보고, 버스 노선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광역행정 시스템을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향식 협력은 거부감이 적고, 작은 성공 경험을 축적하며 신뢰를 쌓아 더 큰 협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됩니다. 행정 경계선을 억지로 지우려 하기보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의 소프트 파워를 키우고 서로의 강점을 연결하는 네트워크형 발전 모델이야말로, 지역소멸 시대의 진정한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소멸 > 정책과 제도의 역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한 규제'의 배신: 상수원보호구역, 그린벨트가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될 때 (3) | 2025.08.02 |
---|---|
군부대 이전·해체, 지도에서 사라지는 '군인 마을'의 기록 (3) | 2025.08.01 |
KTX가 지역소멸을 가속화한다? '빨대효과'의 실체와 교통망의 역설 (2) | 2025.08.01 |